[뉴스토피아 = 남희영 기자] 첫 단추 두 번이나 잘못 끼워진 '친일파 척결'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5년이 지난 1910년에 정치·군사 등 사실상 모든 국권을 잃었다. 이후 36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았으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하고 나서야 겨우 국권을 다시 되찾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김구, 윤봉길, 안창호, 안중근,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반대로 일제를 등에 업고 동족을 위해하거나 일제의 침략에 협조한 친일파들의 만행을 심판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법률을 만들었으나 실패했다.
첫 시도는 미군정기인 1947년 7월 과도입법의원에서 상정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 조사위원회법'이었으나 군정의 반대로, 정부수립 후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만들어 거의 1년간 시행하였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정부 수립 후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제도나 문화의 개혁의 시행이 어려웠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환국 후 친일파들이 제공하는 정치차금을 거절하지 못해 '반민법'대로 친일파를 처벌할 수 없었다.
또한 관료와 군인, 경찰에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친일파를 등용해 친일파의 청산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군정기 때부터 등용되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친일파들이 정부 수립 이후에도 재등용되기도 했으며, 이 후 발발한 6.25전쟁은 이들에게 처벌은 커녕 마치 사면을 받는 시기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비난했고 반민법은 효력을 잃었다.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 당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한일회담이 성사되면서 '친일파'는 결국 청산되지 못했다. 오히려 독립운동으로 힘들게 생활했던 다수의 민족운동가들과 그 후예들은 우대받기는 커녕 찬밥신세였다.
광복 전날인 지난 14일 이완용의 땅 중 극히 일부만이 국가에 귀속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해체된 것에 아직도 일재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 자료에 따르면 정부 소유의 건물이나 공공시설에 설치된 친일파 기념물은 서울에만 10개, 전국적으로 37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파, 독립운동가․․․"그들은 떠났지만 후손들은 남아있다"
가곡의 선구자로 불리던 '현제명'과 민족교육운동을 벌인 선각자로 고려대를 설립한 '김성수'도 친일파로 밝혀졌다. 또한 친일파 명단 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홍난파, 박정희 전 대통령, 3대(조,중.동) 신문사의 전 사장들과 회장, 문인으로는 이광수, 최남선 등도 포함되어있다.
13일 일본대사관 앞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수요집회 현장에서 분신한 최현열(80)씨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14일 공개된 ‘칠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최씨 서한에 의하면 “저는 애국자는 못 돼도 선친께서 항일운동을 하셨기에 평상시에도 항일문제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가 지금은 광주전남 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의 일원으로 있다”라고 글을 시작으로 “역사는 무거운 짐이다. 말로만 애국, 애국 떠벌여도 소용없고 바른 역사 찾으려면 싸울 줄도 알고 죽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친일파 척결은 이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버렸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 시절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이 공포돼 '반민 규명위'의 조사활동을 통해 1천 6명의 친일파 명단을 공시했다. 이로 인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이도 100% 정확한 자료가 되지는 못하는 듯 하다.
정치권에서도 친일파 혹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로 알려진 의원들도 많다. 얼마 전 새정치민주연합의 홍영표 의원은 친일파의 후손임을 밝히고 공개사과를 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선택한 일이 아니지만 후손이라는 이유로 특혜나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죄인취급을 당하며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일본에게···나라를 판 ‘매국노’, 도움 준 ‘친일파’, 친한 ‘부일협력자’
엄밀히 말하면 대표적인 예인 ‘을사오적’ 학부 이완용, 군부 이근택, 내부 이지용, 외부 박제순, 농상공부 권중현 등의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들은 ‘매국노’이다. 매국에 직접적 가담을 하진 않았지만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을 ‘친일파’로 부른다. 그러나 친일파명단에는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친하게 지낸 ‘부일협력자’도 포함된다.
‘매국노’와 ‘친일파’는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민족문화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에서 발표한 친일파는 모두4776명. 반면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에서 제작한 민족운동가,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들의 신상 기록 카드(1920~1940년대 조선총독부 제작 추정)에 기록된 이름은 4,858명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된 이 카드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실제 일제 당국에서 제작한 사진카드는 최소한 7만 5천매 이상이었다고 보고 있다.

오랜기간 파헤쳐서 찾아낸 친일파보다 월등하게 많은 숫자다. 제작시기를 감안하면 한 때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나 일제 말기에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는 이광수, 최린, 주요한 등도 카드에 포함된다. 분명한 것은 36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일제의 지배를 당하면서 친일행각을 한 사람이 고작 4800여명에 그쳤다는 것은 우리 국민의 굳은 저항성을 나타낸다.
한편 후손에게 죄를 묻는 것은 ‘마녀사냥’과도 같은 주장이라는 의견들도 있다. 실제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기보다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누군가를 매도하기 위해 끄집어내는 것도 잘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난 친일파들은 공소시효가 끝났다. 그 후손들만이 남아있어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죄를 묻거나 처단할 방법도 없다.
지나간 일에 대해 후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100년도 지나지 않은 대한민국의 역사이기에 국민들은 아직도 일본에 대한 분노가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잘못된 역사가 있다면 바로 잡아 우리의 후손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아울러 먼 훗날 일제의 긴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이뤄내고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뉴스토피아 = 남희영 기자 / nhy@newstop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