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피아 = 남희영 기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의사는 1879년(고종16)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흥(順興).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은 응칠(應七)이다.
부친 안태훈 진사는 박영효가 주도하던 개화파에서 일본에 파견할 70명 유학생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나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수구파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자 고향에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밑 청계동으로 이사한다. 안 의사는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 마리아 사이에 3남 1녀 중 장남이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해 신식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고 했던 안 의사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닌 부친의 영향으로 민족의식과 개화적 사고가 길러졌다. 또한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연마하고 명사수로 이름을 날리며 민족 청년으로 성장했다.
1094년 2월 러일전쟁 발발로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안 의사는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구국운동을 펼치고 일제의 침략 실상을 외교적으로 알려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귀국했다.
안 의사는 재령군 신환면 김홍섭의 딸 김아려와 결혼해 2남 1녀(딸 현생, 아들 분도, 준생)를 두었다. 1906년 4월 안중근은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해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며 서우학회(후 서묵학회로 개칭)에 가입했다. 부친 안태훈과 친분이 있던 김진사가 1907년 안 의사에게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권했다.
1907년 연해주 의병운동에 참가하고 이듬해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 구국투쟁을 맹세하고자 손가락을 끊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했다. 그와 항일의 뜻을 같이 하는 11명이 동의단지회를 결성해 왼손 넷째 손가락(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을 다짐한 일은 '안중근 의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다.
30세에 ‘대한의군(大韓義軍)’을 조직하고 참모중장 직을 맡은 안 의사는 이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과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할 목적으로 만주 철도의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에 안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뚫고 하얼빈 역에 도착.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앞으로 뛰어나간 안 의사는 브러우닝 권총으로 3발의 총성을 울리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를 오인했을 경우를 대비해 3발의 총탄을 일본인 관리들을 향해 더 발사했다. 안 의사는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재차 외쳤다고 전해진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다음은 안중근 의사가 재판과정에서 당당히 밝힌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죄목이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한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대한제국의 정권을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등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 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한국인들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 유학생들의 유학을 방해한 죄
11. 국어, 역사책등 교과서를 모조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13.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싸움이 일어나는데 태평한 것처럼 천황에게 거짓보고를 올린 죄
14.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깨트린 죄
15. 현 일본 천황(메이지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은 안 의사는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뤼쑨(旅順) 감옥에서 3월 26일 형이 집행되어 모친 조 마리아 여사의 뜻대로 항소하지 않고 의롭게 세상을 떠났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遺墨)이 보물로 지정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됐다.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일대기는 현재까지도 영화, 뮤지컬, 창극, 오페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이어 재조명되고 있으며, 안 의사의 모친인 조 마리아 여사가 아들과 순국직전 주고 받은 편지는 영원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다음은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에게 보낸 유서이다.
어머니 전상서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법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다음은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전문이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것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위대한 인물 뒤에는 항상 위대한 부모가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손가락을 끊어 피로써 독립 의지를 불태운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와 그의 모친 조 마리아 여사의 생애를 돌아보며, 희생과 열정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수많은 순국선열이 꿈꿨던 진정한 광복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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